아침에 일어나니 온몸이 가뿐한 것이 날씨가 좋아서 여행하기에 알맞을것 같았다.
아들과 며느리가 출근하고 두 손자 녀석이 학교로 간 뒤, 나는 여행가방에 옷가지와 생활필수품을 챙겨 넝고 책상위에 쪽지 한 장을 남긴 다음, 3년간의 편안한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나이 일흔 셋에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섰다.
3년전 마누라가 세상을 떠나자 나는 외로와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유중국 군대의 퇴역장교인 나는 우리부부가 평생을 함께 살아온 집에 살 권리가 있었지만, 그러는 대신 자기 집으로 이사하라는 아들의 청을 받아드렸다.
아들은 정성을 다해서 제 아파트에 내가 거처할 방을 마련해 주었다. 따뜻하고 아늑한 방이었다. 창가에는 책상이 하나 놓여 있었고 큼직한 책장이 벽에 붙어 있는가 하면 침대와 흔들의자도 갖추어져 있었다. 아들은 나를 위해 그림 몇점과 서예작품 까지 구해서 벽에 걸어 주었다.
나는 차츰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졌다. 아침 여덟시 이후에는 집안에 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나는 신문을 뒤적이면서 아침 나절을 보냈다. 정오가 되면 부근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며느리가 와서 국수를 끓여 주었다. 점심을 먹은 뒤에는 낮잠을 한숨 자고 나서 석간신문이 오기를 기다리곤 했다.
석간신문이 배달 될 시간이면 으레 손자 녀석들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안이 활기를 띠겠거니 하고 생각하겠지만 그렇지가 않았다. 손자놈들은 집에 돌아오면 내게 공손이 인사를 올리고는 곧장 냉장고 있는데로 가서 먹을 것을 꺼내 먹고는 숙제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였다.
하루에 한번, 저녁식사 시간에 온식구가 한자리에 모였다. 손자녀석들이 식탁을 차리고는 나를 부축하여 자리에 앉혀 주곤했다. 나는 아직 남의 부축을 받을 필요가 없었지만 손자 녀석들의 손을 잡아볼 기회라곤 그때뿐이었기 때문에 녀석들이 부축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음식은 푸짐했으나 식사 분위기는 너무 딱딱한 편이었다. 가끔 두손자 가운데 어린 녀석이 학교에서 재미있는 일을 기억해 내고선 이야기를 늘어 놓으며 깔깔대곤 했다. 그러면 이내 제 어미가 “할아버지 앞에서 왜 그렇게 떠들지?”하고 야단을 치는 것이였다. 사실 나는 녀석들이 지껄이는 것을 듣는 일이 즐거웠는데 말이다.
우리집에서 마누라와 함께 저녁을 먹던 시절이 불현듯 생각났다. 마누라는 텔레비전 광이었다. 우리 두 사람은 TV수상기 앞에 앉아 재미있는 프로를 보면서 천천히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 꽃을 피웠다. 고양이가 부엌에서 그릇을 뒤집어 엎는 소리가 들리면 마누라는 얼른 일어나 부엌으로 달려 갔다가 총총 걸음으로 돌아와선 자기가 못본 장면을 이야기헤 달라고 재촉했다.
저녁식사를 마치면 며느리는 차 두잔을 끓여서 한잔은 나에게 또 한잔은 아범에게 올리곤 했다. 부자가 마주 앉아 함께 차를 마시면서 두런두런 많은 이야기를 나눌수 있을것 같기도 한데 아들은 신문더미에 머리를 파묻은 채 통 말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멍청히 앉아서 텔리비젼만 뚫어지게 쳐다볼 따름이었다. 신문을 다 보고 나면 아들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버님, 이제 늦었습니다. 그만 주무시지요”하고 말했다. 잘 자라는 밤인사 였다.
잠을 이룰수 없을 때는 책을 읽는 것이 제일 좋은 약이지만, 나는 하루종일 신문을 보았기 때문에 더 이상 무엇을 읽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게다가 차를 마신 탓으로 잠이 거 오지 않았고 화장실에 자주 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문을 열고 발끝으로 살금살금 소리나지 않게 걸어 나갔다. 아들과 며느리는 거실 전등의 불빛을 낮추고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었다. 그러니 내가 아무리 조심을 해도, 그애들은 언제나 고개를 돌려 나를 처다보게 되었다. 이런 일이 거듭되자 나는 무안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느날 오후 이웃 노인 몇사람이 마작을 하자며 찾아왔다. 우리는 동년배 끼리 어울리게 되어 정말 흥이났다. 모두 70이 넘은 늙은이였지만 한무리의 어린애들처럼 희희낙락 하며서 마작을 했다. 손자들이 학교에서 돌아오자 그때부터 우리 늙은이들은 존 점잖게 행동하기 시작했다.
며느리가 퇴근해서 집에 돌아왔을때 나는 며느리를 따라 부엌으로 가서 말했다.
“얘야, 저 양반들에게 저녁을 함께 먹자고 청하고 싶구나. 뭘 좀 준비해 줄수 있겠냐?”
“네, 아버님, 지금 준비 하겠어요,”
며느리는 진수성찬을 차려 올렸다. 아들은 식탁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손님들은 모두 점잖게 굴었다. 하지만 그날은 정말로 즐거운 하루였다. 저녁식사를 마친 뒤에 우리는 밤10시 까지 마작을 했다.
이튼날 아침 아들이 입을 땠다. “아버님, 집사람은 하루 종일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처야 하고, 또 집에 오면 이것 저것 할일이 많아요. 미리 말씀도 없이 손님을 청하시면 집사람이 지치지 않겠습니까? 다시는 그렇게 하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말이 온종일 나를 괴롭혔다. 다시는 그렇게 하지 않으마.
근래에 와서 언제나 시장기를 느꼈다.
아침식사 때 많이 먹어도 열 시만 되면 출출 해지곤했다. 점심을 멱고난 뒤에도 마찬 가지였다.
저녁식사 후의 시장기가 제일 심했다. 배가 너무 고파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을 지경 이었다.
집안에 대형 냉장고가 있었지만 그안에 내가 먹을 만한 간식이라곤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매일 아침 늙은 행상 한테서 만두를 세 상자씩 사먹기로 시작했다.
만두를 사먹기 시작한 뒤로는 시장기를 느끼지 않게 되었고 밤에 잠도 편안히 잘수 있었다.
만두장수와 몇마디 이야기를 주고 받는것도 즐거운 일이었다.
만두장수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성대를 사용할 기회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내가 입을 여는 때라곤 손자들이 아침에 학교에 가면서, “잘 다녀 오겠습니다.” 하고 인사 하거나
밤에 “안녕히 주무십시오” 하고 인사 할때 뿐인것 같았다.
어느날 만두장수는 내가 준 100유안짜리 지폐를 거슬러 줄 돈이 모자랐다.
나는 만두장수에게 우수리는 내일 받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날 오후 며느리가 퇴근해서 집에 돌아 오더니, 만두장수가 내게 전해 달라고 하더라면서
거스름돈을 건네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 잡수시고 싶은것이 있으면 제게 말씀헤 주세요.
그러면 제가 사다 드리겠어요. 그렇지 않고 아버님이 몸소 사잡수시면, 사람들이
우리가 아버님을 잘 돌보지 않는다고 생각할 거예요.”
눈 깜짝할 사이에 2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작은 손자가 벌써 중학교에 들어 갔고,
그애의 일과는 한층 더 빈틈없이 짜여졌다. 이제는 바이얼린교습 외에도 미술과 영어과외지도를 받았고,
학교에서는 합창연습을 했는데 일요일에도 놀 틈이 없었다.
손자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이 숱하게 많았지만
지난2년 동안에 나는 단 한가지도 이예기할 기회가 없었다.
그렇지만 나는 현제의 생활에 자족해여 한다고 마음을 달랬다.
내가 무엇을 더바랄수 있으랴 ? 그런데 그무렵 왠지 몸이 불편했다.
늘 갈증이 나고 오줌이 자주마려웠다. 그리고 항상 피곤했다.
어느날 저녁식사 때 아들이 무엇인가 좋지 않은 낌새를 알아 채고 말했다.
“아버님 병원에 가서 검진을 한번 받아 보시지 않으시렵니까?”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다. 병원에서 돌아오니 며느리가 근심스런 얼굴로 물었다.
“검사결과가 어떻게 나왔어요?”
“의사는 당뇨병이라 하더구나.”
“당뇨병이라고요! 전염병인가요?” 학교 교사인 며느리가 어떻게 그런 유치한 질문을 할수 있단 말인가 ?
며느리는 아마도 신경이 너무 곤두서 있었기 때문에 올바르게 생각 할수 없었던것 같다.
“전염병은 아니란다. 음식을 주의해서 먹고, 약을 규칙적으로 복용하면 괜찮아질 것이라는구나.”
그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아들이 말했다. “저는 아버님이 병에 걸린줄 진작 알았어요.
음식을 너무 많이 먹는것이 건강에 좋지 않다는 사실은 요즘 누구나 다아는 상식입니다.
그런데 노인네들은 사람들의 충고에 귀를 기우리지 않거든요. 이제 병이 났으니까 아버님은 아실 껍니다.
며칠이 지나자 내몸이 서서히 회복되기 시작했다. 하루하루는 전과 다름없이 평온하게 지나 갔지만
나는 온갖 뒤숭숭한 상념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어느날 문득 옛친구 생각이 났다. 우리는 그때 거의 3년이나 서로 만나지 못했다.
마누라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그친구는 대남(坮南)으로부터 올라와서 장례식이 끝난뒤 며칠간
우리집에 머물러 주었다. 우리는 동향인이었는데 그 친구가 나보다 1년 먼저 군사학교를 졸업했다.
그가 군에서 전역한 뒤 우리부부는 그친구한테 우리집에 와서 함께 살자고 했지만,
그는 이를 마다하고 정부에서 지은 양로원에 들어가 버렸던 것이다.
“그래 양로원생활이 어떻던가?” 하고 내가 물었다.
“ 아, 현대식 건물에다 진짜 멋지다네. 그리고 대부분의 입주자들이 우리 연베의 늙은이 들 이지.
밥은 직접 지어 먹을 수도 있고 식당에 가서 먹얼 수도 있어.”
“ 진(陳)형도 거기서 산다고 들었는데.”
“ 그래 장년(張年)형도 그기 살지. 우리 몇몇 옛친구들은 함께 어울리며 잘 지내고 있다네.
오전에는 시장에 같이 가고 요리비법을 서로 교환하지. 저녁이면 합께 모여서 텔레비전을 보거나
이야기를 나누고, 모두 자기가 마실 차를 끓여 가지고 와서 자기가 좋아하는 의자에 앉아 담소를 즐긴다네.
또 의사가 정기적으로 와서 건강진단까지 해준다네.
단 한가지 나쁜점이 있다면, 이따금 나이든 친구가 한사람씩 세상을 떠나는 것이지.
하지만 그거야 우리 나이면 당연히 예상해야 되는 일이 아닌가?”
“나도 거기 들어 갈수 있을까?”
“그야 물론이지. 빈방이 나면 언제든지 가능해. 그런데 자네는 가족이 있지 않은가.
자네 처는 세상을 하직했지만 그래도 아들이 있지 않나. 우리가 자식을 기르는 까닭은 결국 그애들이
만년에 우리를 돌봐 주는것을 기대하기 때문이 아니겠어? 자네는 아들과 더불어 편안히 즐기게,”
만년을 편안히 즐기자 ! 나는 그친구와 주고 받은 대화를 상기하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야, 나는 이미3년을 편안히 보냈으니 그것으로 족해. 이제는 옛 친구들을 찾아 가련다.
양로원에 빈방이 없으면 방이 날 때 까지 기다리면 되지.
내겐 당분간 여관에 묵을 만한 돈도 있어.
나는 기차역으로 가서 남행열차 승차권 한 장을 샀다.
열차가 도착했고 나는 다시 한번
사람들의 물결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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